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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아닌데, 마치 내 것처럼 보이는 왜곡된 환상 - 빚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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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RBN 댓글 0건 조회 271회 작성일 21-04-1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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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freepik

전형진의 [중독 인생을 위한 마음 처방전] (16)

어느 날 한 50대 중년 부인이 진료를 받으러 내원했다. 표정이 상당히 어둡고 심각했다.

“남편이 이혼을 요구해요. 제가 돈 관리에 약하거든요.
  허튼일을 벌이는 것도 아닌데, 생활비가 자꾸 마이너스가 나요.
  남편이 알면 야단이 날 테니 몰래 카드론을 사용해 펑크 난 부분을 메우곤 했죠.
  그런데 그게 자꾸만 불어난 거예요. 어느새 남편이 모르는 빚이 5,600만 원에 달하게 됐어요.
  그걸 남편이 알게 된 거죠. 난리가 났어요. 어떡해야 좋을까요?”

난감한 일이었다.
살다 보면 빚을 질 수도 있지만, 문제는 아내가 남편 몰래 오랫동안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남편으로서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파김치가 되도록 일해서 돈을 벌어다 줬는데,
저축은 고사하고 큰 빚을 지고 있었다는 데 대해 화가 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건 돈 문제였으나 근본적 원인은 마음의 문제였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30대 젊은 여성이었다.
공황장애로 3개월 넘게 상담과 약물치료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하루는 몹시 불편한 기색으로 쭈뼛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남편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요.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해서 주식을 해요.
  남들이 다 한다니까 따라 하는 거예요.
  모아둔 돈 다 털어 넣더니 돈이 없으니까 대출을 받고
  대출도 막히니까 친구들한테 빌려서까지 주식에 목을 매더라고요.
  둘이 벌어 이자 갚기도 버거울 지경이에요. 이건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라고요.
  곧 대박 날 거라고 하지만, 이미 쪽박이에요.”

요즘 이런 젊은 부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 푼 두 푼 월급을 모아 내 집을 마련하거나 여유 있는 노후를 설계하기 어려우니
일확천금을 노리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오히려 돈을 다 날린 채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올라앉는 경우다.

대한민국 서민들의 빚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길게 이어지면서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자 가계와 기업의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0년 말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신용(가계와 기업의 부채 잔액) 비율이 215.5%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는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75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이며,
전년 대비 증가 폭 또한 18.4%로 최대라는 것이다.
청년들은 취업이 어려워 빚을 지고, 중장년층은 수입이 줄어 빚을 지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은 경기가 악화해 빚을 지는 형편이다.
가계부채는 2020년 말 1,726조 1,000억 원으로 늘어났고,
기업부채 역시 2,153조 5,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가계와 기업이 빚에 허덕이면 정부가 규제를 풀고 혜택을 줘서
자생력을 가지고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하지만, 정부도 내 코가 석 자인 형편이다.
코로나 사태로 세계 경제가 꽁꽁 얼어붙은 상태에서 방역과 민생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야 하기에
국가채무 또한 천정부지로 상승 중인 추세다.
2021년에 들어서 정부는 15조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포함한 4차 재난지원금 집행을 시작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965조 9,000억 원까지 치솟게 되었다.
나라의 빚이 1,000조 원에 달하게 된 것이다.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비율 40%의 벽은 이미 허물어졌고,
50%를 넘어설 날도 머지않았다.

대한민국은 지금 개인도 기업도 정부도 빚의 늪 속으로 시나브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가랑비에 옷 젖듯 남의 돈을 무서워하지 않고 가져다 쓰다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빚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는 말이다.

예전 어른들은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기에 빚 얻어 쓰는 일을 극도로 경계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외상은 빚이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가장 큰 재산이자 먹고사는 일의 근간으로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심이었다.
그런 소를 잃는다는 건 생계 수단을 송두리째 잃는 것과 같았다.
자꾸 빚을 지다 보면 내 목숨까지 위태로워질지 모른다는 따끔한 경고였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빚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빚 권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듯하다.
대학생들은 비싼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해 학자금 대출을 받는다.
졸업해 취직하면 몇 년 동안 월급 일부를 학자금 대출 상환에 쏟아부어야 한다.
독립하면 전세자금 대출로 집을 마련해야 하고,
결혼하면 신혼부부 대출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고자 한다.
이 돈을 다 갚지도 못해서 자녀들 학비에 부모님 노후 자금까지 보태야 한다.
그나마 억척같이 성실하게 산 사람이라야 50대쯤에 이르러 중산층의 삶을 누릴 수 있다.
만약 중간에 회사에서 쫓겨난다든지, 사업을 한다든지,
불확실한 투자에 몰두하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공산이 크다.
사회 안전망이 부실한 우리나라에서 과도한 빚은 불행한 노후를 낳을 뿐이다.

자신의 경제적 수준과 능력을 벗어나 과도하게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 집착하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심리는 우울증과도 관련이 있다.
남들은 다 많은 돈을 벌고 쉬운 방법으로 거액을 손에 넣는데,
나만 바보같이 쥐꼬리만 한 월급에 의지해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것이다.
도박은 불법이지만, 주식이나 부동산은 합법이기에 낙오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뛰어든다.
한번 맛을 들이면 수익을 내건 손실을 보건 간에 빠져나오기 힘들다.
온 신경이 그곳에 가 있어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하기에 업무 수행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자기 효능감이 저하되어 우울증이 찾아오기도 한다.

빚 중독은 의학 용어가 아니다.
빚을 자꾸 지는 심리를 병리 현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기 때문에
정신의학적으로 그 저변을 면밀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일들이 나에게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면
혹시 내가 빚에 중독돼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1. 월급날이 다가오면 막아야 할 카드 대금과 갚아야 할 빚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다.
2.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면 순식간에 여러 군데로 빠져나가고 다시 마이너스가 된다.
3. 이 카드에서 빚을 내 저 카드를 막고, 이 사람에게 돈을 꿔서 저 사람에게 갚는다.
4. 그렇게 하는데도 제날짜에 갚지 못한 빚과 이자 때문에 수시로 독촉 전화를 받는다.
5. 주택 등 내가 가진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쓴 일이 있다.
6. 매달 당면한 위기를 넘기는 데 급급할 뿐 빚 청산에 대한 계획이나 대책은 없다.
7. 배우자 또는 가족 간에 빚 문제로 다툼을 벌이는 일이 많다.
8. 아무리 벌어도 빚 갚고 이자 내고 생활하는 데 쓰면 남는 게 없다. 오히려 모자란다.
9. 이 모든 빚을 갚고 남들처럼 당당하게 살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크게 한탕하고 싶다.
10. 주변 사람들이 나만 보면 돈을 빌리거나 보증을 서달랄까 봐 슬슬 피하는 기색이다.

빚 중독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과연 어떤 치료 방법이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들이 빚 중독의 치명적 늪에서 헤어 나와
정상적인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과 현실을 냉철히 돌아보고 분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혼자서 할 수 없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내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직면해야 한다.
과도한 빚은 가족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고 고통을 줄 가능성이 크므로
배우자나 다른 가족과의 동반 치료도 고려해야 한다.
한 사람의 빚 중독자는 주변 사람에게 줄줄이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칫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자책감 때문에
자해나 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고, 폭력과 이혼으로 가정이 파괴될 수도 있으며,
무모하게 회삿돈이나 공금에 손을 댈 수도 있다.
이런 사고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더 악화하기 전에
주변 사람이나 가족의 도움으로 정신건강의학과나 전문기관 등을 찾아 구체적인 조력을 구해야 한다.
신용불량자로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어진다.

경제 전문가를 통해 실질적인 경제 공부를 하는 게 좋다.
자신의 재산과 빚이 얼마인지 파악해 보고, 빚을 갚기 위한 계획과 대책을 치밀하게 세워야 한다.
제대로 된 경제 지식이 없는 까닭에 돈 관리를 잘하지 못하고 빚은 지게 된 경우가 많다.
투자와 투기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정확한 경제관념이 수립되면 내가 땀 흘려 번 돈이 내 것이고,
내 것이 아닌 건 쳐다봐서도 안 된다는 원칙이 세워질 것이다. 불
로소득을 꿈꾸는 건 잘못된 환상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
성직자처럼 무소유를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살 수는 없다.
타인의 자본을 잘 활용해 사업을 하고 기업을 성장시키고 부를 일구어
재분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미덕이다.
내 돈만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는 세상인 건 확실하다.
그러나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생산적인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감당할 수 없는 빚은 지지 않으며,
불로소득이나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불건전한 환상을 품지 않는 것도 자본주의의 미덕이다.
이것이 깨지거나 무너지면 자본주의는 빚의 굴레에 갇힌 비생산적 체제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표본인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런 말을 남겼다.
“돈을 빌리러 가는 것은 슬픔을 빌리러 가는 것이다.”

수백 년 전 이야기라 요즘 현실에는 맞지 않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된 가치와 교훈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한 법이다.
남의 돈으로 나의 행복을 살 수는 없다.

당대 계몽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런 말도 한 적 있다.
“버는 것보다 적게 쓰는 법을 안다면 현자의 돌을 가진 것과 같다.”

슬픔을 빌리러 다니느니 차라리 현자의 돌을 구하는 게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언론] 정신의학신문 [기자]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출처] http://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0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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